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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신화의 주인공 김태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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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신화’를 이룬 김태연 회장이 말하는
‘나를 성공으로 이끈 가족들의 멸시와 폭력, 그리고 사랑’

미국 1백대 우량기업에 선정된 라이트하우스를 비롯해 6개의 회사를 거느린 김태연 회장.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집안에서 구박덩이로 태어나 22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맨몸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일구기까지 그의 인생역정은 한편의 드라마 그 자체다. 그가 직접 털어놓은 나를 성공으로 이끈 가족들의 ‘멸시와 폭력, 그리고 사랑’.

“여자라고 멸시했던 아버지, 전남편, 사랑으로 나를 따른 아홉명의 자식들, 모두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가족들이죠”
지난 설날 연휴 동안 MBC에서는 한 개인의 인생역정을 3일에 걸쳐 집중적으로 다루는 사상 유례 없는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주인공은 미국 1백대 우량 기업으로 선정된 라이트하우스를 비롯, 6개의 회사를 거느린 김태연 회장(56).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사회에서는 맨몸으로 ‘실리콘밸리의 신화’를 창조한 여성으로 유명하다. 경제한파로 시름에 겨워하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던져준 그를 만나 오늘의 성공이 있기까지의 인생역정을 들어보았다.

4년 만에 다시 고국을 찾은 그를 만난 것은 숙소인 힐튼호텔. 첫인상이 실제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였고, 키(150cm)가 작아서인지 연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6개의 기업을 거느린 그룹 총수에다, 태권도 8단의 ‘그랜드마스터’로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말투와 행동에서 보통 사람과는 다른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는 68년 22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맨몸으로 ‘정수원’이라는 미국 서부 최대규모의 태권도장을 세웠다. 85년엔 실리콘밸리에 진출, 컴퓨터를 이용해 미세먼지까지 제어하는 클린시스템을 개발·제조하는 라이트하우스사를 설립했다. 현재 매출규모 1억달러로 동종 회사에서는 최고의 매출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모닝플라넷, 미용성형장비와 스킨케어를 전문으로 하는 엔젤힐링 등 6개의 회사를 설립, TYK그룹을 이루고 있다. 이외에도 그는 텔레비전프로그램 공급업체인 노스스타를 운영하면서 직접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한다. 이 프로는 미국 전역에서 5백만명이 시청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물어요. 성공비결이 뭐냐고. 그럼 저는 ‘왜 너는 안 달렸니?’ 하고 반문하죠. 저라고 특별한 점은 없어요. ‘Can Do.’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죠. 저는 할 수 있다는 마음의 자세가 있느냐가 성공의 열쇠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왜 너는 안 달렸니?’하는 반문은 역설적으로 그가 성공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하는 가슴 깊은 흉터였고, 응어리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안 달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해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저는 제 가족들로 인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멸시와 천대, 첫아이를 아들로 낳지 못한 어머니의 한, 백인우월주의에 빠진 전 남편과 시집, 그리고 피부색이 다른 나를 친엄마 이상으로 사랑하고 믿고 따라준 아홉명의 자식들, 그 중에서 어느 한 가족이라도 없었다면 오늘의 저는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대뜸 정월초하루 자시(자정 전후)에 뭘 하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다 생각난 것이 묵은 세배. 요즘이야 없어졌지만 과거엔 해를 넘기는 시간에 일년을 무사히 보내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절을 웃어른께 올리고,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김씨 문중의 종손이었던 김태연 회장의 할아버지 집에서도 정월초하루 자시에 문중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사는 자꾸만 늦춰졌다. 아기가 태어나려고 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손자, 더구나 정월초하루 자시에 태어날 아이였으니 할아버지의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온 집안 사람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태어난 아이는, 그러나 사내가 아니었다.

“저에게 고추가 없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할아버지는 조상들의 위패 앞에서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큰 고통을 주십니까’ 하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해요. 할머니는 ‘정초부터 계집애가 튀어나오고, 이제 김씨 집안 망했네’ 하며 부엌에서 끓이던 미역국을 솥째로 마당에 내던졌다고 하더군요.”

그는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어긋나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실망을 넘어 분노를 표출했다. 경북 김천에서 여러 명의 소작농을 거느린 천석꾼으로 마을 사람들에게는 정 많고 인심이 좋은 할아버지였지만 김태연에게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구박이 말도 못했어요. 다른 사람에게 기쁜 설날이 저에겐 가장 끔찍한 시간일 정도였으니까요.”

할머니는 계집애가 태어났다고 끓이던 미역국을 솥째 내던져

심지어 할아버지는 첫아이로 아들을 못 낳고 딸을 낳았다고 자식과의 인연을 끊어버렸고, 그로 인해 김태연의 아버지는 주벽과 바람기로 그 냉대와 멸시를 잊으려고 했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할아버지의 무관심으로 인한 피해는 결국 어머니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기울어가는 집안살림을 꾸리느라 손톱에 피고름이 맺히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양잿물이란 단어였어요. 어머니는 힘들 때마다 저를 붙잡고 이게 다 너 때문이라며 차라리 같이 양잿물을 마시고 죽자는 말을 입에 달곤 했죠.”

그는 지금도 다섯 살 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6·25 전쟁 때 남동생을 업고 있는데 갑자기 비행기에서 폭격이 쏟아졌다. 공포에 떨며 울고 있는데 도시에 나가 공부하던 이모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안기는데 이모는 남동생만 들쳐업고 방공호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이렇듯 그는 김씨 집안에서 버림받은 아이였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아이였다. 따라서 그가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와 기에 심취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넌 안돼’ ‘넌 재수없는 아이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요. 그때마다 마음 속으로 막연하지만 ‘왜 난 안돼?’라는 반문이 일었어요.”

그는 커가면서도 계속해서 아버지로부터 냉대와 구박을 받았고, 나중에는 퍼렇게 멍이 들도록 손찌검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직 정월초하루에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러던 어느날 커다란 파문이 일어났다. 술취한 아버지가 그를 때리는 것을 본 남동생이 흥분해서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을 한 것이다. 남동생은 아버지를 때렸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건 우리 집안에서 너무 슬프고 충격적인 일이었어요. 결국 우리는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68년 도망치듯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죠.”

미국에 와서 2년 뒤 그는 자신의 가정을 꾸렸다. 미국인과 결혼을 한 것이다. 남편은 한국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던 중 김태연의 할아버지를 알게 된 미국인이었다. 김씨 가족이 살고 있던 버몬트 출신에다 태권도까지 배운 터라 김태연의 배필감으로 잘 맞는다고 본 할아버지가 적극 연을 이어주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강요 속에 얼떨결에 결혼식을 올렸다. 마음 속엔 솔직히 이제 더 이상 정월초하루에 태어난 재수없는 계집애란 오명을 벗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시집 식구와 함께 산 시집살이는 고추보다도 더 매웠다. 인종차별에 대한 편견으로 시어머니와 두 명의 시누이가 드러내놓고 눈치를 주고 구박했다.

힘든 시집살이로 인해 그는 두 번이나 유산을 했다. 첫번째 유산 때 자궁이 약하다는 진단을 받아 두 번째 임신에서는 무척 조심했으나 큰 시누이의 폭언으로 충격을 받고 유산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황색인종의 피가 섞인 아이를 얻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냉대가 심했다고 한다.

“저는 그곳에서 강아지보다도 못한 존재였어요. 그들은 강아지를 끔찍이 아끼며 귀여워했지만 저에겐 전혀 그러지 않았죠.”

시집과의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 분가도 해보았지만 이미 부부사이의 애정은 사라진 후였다. 결국 남편과 결혼 10년만인 1980년에 이혼을 했다. 애정도 싸늘하게 식어있는 데다 남편이 술주정까지 했던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들끼리 새로운 가족을 이뤄

“결혼 생활 동안 식물인간 상태가 되기도 하고, 교통사고와 자궁종양으로 죽음의 상황에 처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생사의 기로에 서니까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지더라고요. 그러면서 이제 못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도 생기고요. 왜냐하면 죽음의 직전까지 갔으니 이제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잖아요.”

그는 오직 운동에 전념했다. 7세 때부터 외삼촌에게 배우며 실력을 쌓은 태권도 실력을 바탕으로 도장을 세운 것이다. 태권도장은 수련생이 60명이 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는 태권도를 통해 새로운 가족을 만나게 된다.

도장을 시작한지 1년쯤 지나자 도장 분위기가 이상했다. 진상을 알아보니 하나 둘 유단자가 생겨나면서 그들이 작당해 스승인 그를 내쫓고 자신들이 도장을 차지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동양인 여자라고 우습게 본 것이다.

그는 갓 들어온 흰띠 몇명만 남겨놓고 모두 제명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도장 문을 닫았다. 그런데 제명된 제자들 중에서 다시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한 청년이 한명 있었다. 마약에 빠져 생활하다 태권도를 배우며 새 인생을 시작했다는 유태인 청년으로 이름이 스캇이었다. 스캇은 김태연을 진정한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다.

그뒤 스캇은 김태연을 어머니로 모시겠다고 간청했다. 양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스캇 이외에도 마이클과 토머스가 제자로 태권도를 배우며 그를 믿고 따르다 양아들이 되었다.

“입양하려고 해서 한 것은 아니고, 제가 정에 굶주리고 뼛속 깊숙이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는 만큼 남에게 베풀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아이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고요.”

당시 김태연에게는 한가지 계획이 있었다. 컴퓨터산업에 뛰어드는 것. 컴퓨터 업계가 바야흐로 퍼스널 컴퓨터 시대를 열던 1981년의 일이다. 처음에 그의 사업계획은 황당했다. 컴퓨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던 그는 컴퓨터사업을 하기 위해 양아들들에게 대학에 들어가 컴퓨터를 전공하도록 한 것이다. 그의 제안은 무모해 보였지만 아이들은 단 한마디의 이의 제기나 반대없이 그대로 따랐다. 그만큼 그에 대한 신뢰가 확고했다.

사업을 준비하면서 그와 자식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방 두 개짜리 비좁은 아파트에서 덩치 큰 사내 3명과 그가 함께 생활하기에는 불편한 것이 많았다. 더구나 돈이 없어 끼니를 수제비와 고구마로 때웠다. 정육점에서 쓸모가 없어 버린 소뼈를 얻어 푹 고은 국물에다 가장 값이 싼 음식인 밀가루를 사다 수제비를 만들어 넣은 것을 서양 아이들은 투정 한번 없이 오히려 ‘원더풀’을 연발하며 먹었다.

아침마다 4명이 화장실을 가려니까 항상 붐볐고, 그로 인해 낭비되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래서 그가 제안한 것이 1인당 화장실을 1분20초씩만 쓰는 것.

“밖에다 모래시계를 놓고 시간을 재는 거예요. 1분20초가 지나도록 안나오면 마구 문을 두들기죠.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정말 재미있는 광경이 아침마다 펼쳐졌죠.”

그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함께 한국에 온 장남 스캇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며 웃었다.

현재 그는 6남3녀, 모두 9명의 양자를 두고 있다. 두명의 딸은 딸인 동시에 며느리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어린 시절 깊은 상처로 인해 마약, 섹스, 폭력에 중독되어 방황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일까,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구박받았다는 비슷한 상처를 안고 있는 김태연에게 더욱 쉽게 마음을 열었고, 그의 말을 믿고 따랐다.

“저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제 생일날 미역국을 먹은 적이 없어요. 설날에 누가 제게 미역국을 주겠어요. 그런데 어느날 새해 첫날에 큰며느리 에리카가 미역국을 끓여놓았더라고요. 그러면서 ‘어머니, 이제 미역국 많이 잡수세요’ 하는데 얼마나 기쁘고 눈물이 나던지….”

또 50세 생일날엔 밤늦게 집으로 들어서는데 거실 가득 커다란 고추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더라고.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고추 없이 태어나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장난스럽게 고추를 매달아 놓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스캇이 “어머니, 이제 고추 없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대신 우리들이 있잖아요” 하면서 위로를 해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고.

짧은 인터뷰였지만 그는 가족이야기를 하며 몇 번이나 눈물을 흘리고, 웃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오늘날의 성공이유를 자신을 미워했건 사랑으로 믿고 따랐건 간에 모두 가족들의 공으로 돌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가족의 미움이든 사랑이든, 그것을 성공의 밑거름으로 만든 것은 결국 그의 공이 아닐까.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나를 성공이라는 말로 표현한다>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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