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아고라 torreypines 님 글
요즘 저와 인수위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으시죠? 잘 압니다. 그런데 믿으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여러분 만큼이나 마음 고생이 말이 아닙니다. 너무 답답해서 오늘은 인수위원장으로서 공식적으로 드릴 수 없은 얘기를 온라인이란 형태를 빌려서 좀 말씀 드릴까 합니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이명박 장로님이 처음 인수위원장 말씀을 꺼내셨을 때 저는 조크를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장로님이 실없는 말씀도 잘 하시는 편이고, 제가 대학 총장으로 돈 긁어 오는 수완은 탁월하게 발휘했지만 그 외에는 뭐 별로 내세울 게 없지 않습니까.
제가 다닌 숙대는 솔직히 얘기해서 당시는 원서만 내면 들어 가는 학교였고, 그래서 정외과를 수석 졸업하고도 이름있는 대학은 원서만 내본 거로 만족하고 사우스 캐롤라이나대학에서 학위를 한 거 아닙니까. 교수는 몇십년을 했어도 학자로서 내놓을 만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학교 밖의 활동중에는 존경하는 전두환 대통령 밑에서 국보위 입법위원과 민정당 국회의원을 한 경력이 있지만 이제는 그 좋던 세상도 바뀌어 그마저 숨겨야 되는 처지고…
그런데 장로님께서 인수위 위원도 아니고 위원장을 말씀하시니 곧이 들렸겠습니까? 저자신이 믿지 않고 시작했던 숙대 발전기금 모금은 교회에서 선교하듯 안면 깔고 무대뽀로 해서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총장을 네 차례씩이나 해 먹고 있죠. 그렇다고 차원이 다른 철학, 비전, 경륜, 존경…이런 게 필요할 것같은 인수위원장직을 잘 수행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입법위원 수락할 때와 마찬가지로 국가에서 부르면 밥 먹다가도 달려간다는 일념으로 수락했습니다.
장로님이 출마하시면서 같은 교회에 다니며 장로, 권사로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저는 당선되시면 무슨 자리든 하나 꿰찰수 있겠구나하는 기대는 쭉 하고 있었죠. 또 총장 장기집권에 대한 교내외의 여론도 좋지 않아서 물러날 때도 되었고요. 그러나 이렇게까지 대박을 터뜨릴 줄은 몰랐습니다. 할렐루야! 소망교회 만세!
그러나 꼭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찜찜한 구석이 있었죠. 제가 아무리 내놓을 게 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박사인데 진짜 이유가 뭘까하는 게 왜 안 궁금했겠습니까? 그렇다고 장로님한테 톡 까놓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돈 긁는 재간에서 코드가 맞아서? 같은 교회 권사라고? 정말로 CEO형 총장으로 실적을 인정해서? 아니면 만만한 사람 앉혀 놓고 지 맘대로 하려고? 정말 이 생각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 데…내 인물이 그 ‘인생의 지혜’가 술안주감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 주기에 적합해서? 그만 하죠. 너무 퍼스널한 얘기까지 꺼낸 것 같네요.
어쨌든 당선자와 같이 일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일하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선거 공약에는 없었지만 신용불량자 부채탕감, 휴대전화요금 인하와 같은 좋은 아이디어도 내 놓아 보기도 했지만 여론의 비판과 업계의 반대등의 이유로 아쉽게 접었어야 했죠. 그렇지만 그런 좌절은 정책입안 과정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로, 실패를 통해 배우면 되는 거죠. 그런데 정말 힘든 건 따로 있습니다.
당선자의 철학과 리더쉽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전에 torreypine(s)이라는 닉을 가진 어느 네티즌이 당선자가 60년을 넘게 살며 가져 본 유일한 인생관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출세하고 돈 벌어라’라고 쓴 글을 읽으며 공감이 가는 글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까이서 보기에 당선된 후의 당선자 머리속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자격지심을 극복하기 위해 뭔가 다른 걸 빨리 보여줘야 되겠다는 강박감 하나 뿐인 것 같습니다. 멀쩡한 교회 장로라고는 하지만 소속당에서조차 국회의원 공천 신청도 못 할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니 이해가 가는 얘기죠.
그런데 그렇게 하나만 보고 장애물을 제거하며 앞으로 나가는 단선적인 사고방식은 재벌 오너에게 잘 보여야만 본인이 원했던 정도의 출세를 할 수 있었던 그의 상황이나 이삼십년전의 기업경영에서나 통했을 법 한 방식이지, 오늘의 기업에서는 벌써 퇴출 당했을 사고방식이죠. 하물며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단계나 우리 사회 각 층에서 분출되는 욕구의 다양함을 고려할 때는 두 차원 정도가 부족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처음에는 의욕도 꽤 있었지만, 뒤에서 매니퓰레이트 하다가 여론이 아니다 싶으면 저만 남겨놓고 모르는 체 하는 당선자의 거듭되는 무책임한 태도에 얼마 전부터는 굿이나 보고 케이크나 먹자하는 심정으로 일해왔습니다. 특히 최근에 터진 영어 몰입교육 문제에 대해서도 억울한 부분이 많습니다.
물론 영어문제에 대해서는 저나 당선자나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부분이 많습니다. 저는 이미 처음 유학가서 영어때문에 오렌지도 못 얻어 먹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당선자가 영어하는 거 보셨죠? 해외건설을 개척한 회사의 CEO까지 한 사람 영어가 웬일로 미군 하우스보이 출신만도 못 합니까? 그러니 둘 다 영어에는 맺힌 게 많죠.
그러나 너무 앞서 나가는 듯한 거는 제 잘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대부분 짐작은 하시겠지만 몸통은 따로 있고 저는 깃털일 뿐입니다. 훼더요 훼더! 특히 전과목 영어교육, 조기유학생 군대면제와 같은 아이디어는 절대로 제 것이 아닙니다. 제가 공식적으로는 영어 몰입교육에 관한 모든 것이 제 철학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제가 대통령입니까 제 철학으로 교육정책을 뒤집어 놓게?
저 혼자 다 뒤집어 쓸 상황이 아닌데 분위기는 그렇게 흘러 가고 있습니다. 당선자는 빠지고 언론은 저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그러다보니 여론은 저만 죽일 년으로 생각하는 거죠. 요즘 당선자를 만나도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원래 웃을때나 화났을때 한쪽눈이 더 찌부러져 거의 감기는데, 웃지도 않는데 감는 거 보면 제가 하는 일이 마땅치 않은 모양입니다.
잘못했으면 특검 정국이 될 뻔한 1월 한달을 온몸으로 때워 막았는데 이제는 여론이 안 좋다고 버릴 생각을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벌써 1기 정부에는 못 끼고 비례대표라는 설이 언론에서 나오는데 비례대표 1번은 원래 여자한테 주는 거 아닙니까. 토사구팽 소리 안 들으려고 하는 짓이죠. 언감생심 총리까지는 아니라도 장관은 해 봐야할 거 아닙니까? 장관도 못 하면 이게 무슨 챙피입니까?
결국은 누가 봐도 자리에 비해 모자라는 저를 인수위원장으로 선택한 거는 제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꿰뚫어 보고, 특검 정국을 무사히 넘길 수 있게 바보짓을 해 줄 사람으로 지목을 한 거군요. 그런 것도 모르고 당선자가 힌트만 조금 보내면 눈치없다 소리 안 들으려고 미친년 널뛰듯 뛰었으니 제가 정말 넛 케이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니 이번 총장 임기만 마치고 은퇴해서 교회일이나 열심히 할 걸 그랬다하는 후회도 하고요. 다른 한 쪽으론 국보위도 했는데 뭔들 못 하겠냐하는 생각도 아직 있고요. 저도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두서 없이 늘어 놓은 넉두리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안 쓰려고 노력했지만 저도 모르게 나와버린 영어 표현은 양해 바랍니다.
필자주) 이상은 이경숙 인수위원장이 어제밤 꿈에 나타나서 저에게 한 넋두리를 받아 써 놓았다가 한자도 틀림없이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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