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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살아있는 宮의 황실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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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高ㆍ백제의 餘(徐)ㆍ신라의 金ㆍ고려의 王ㆍ발해의 大(太)

<고구려>는 횡성 고씨(橫城高氏) -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둘째 아들 인승(仁勝)이 동국고씨(東國高氏)의 시조이고, 중시조 인승으로부터 12세 손인 민후(旻厚)가 횡성에 정착, 횡성고씨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는 부여 서씨(扶餘徐氏) -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 마지막왕, 재위기간 : 641∼660)의 세째 아들 융(隆)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신라>는 부안 김씨() - 경순왕의 첫째 일(鎰:마의태자)를 시조로 한다.

<고려>는 개성 왕씨(開城王氏).

<발해>는 협계 태씨(陜磎太氏) - 발해(渤海)가 망하자, 세자(世子) 광현(光顯)과 화균(和均). 원균(元均) 등은 많은 유민(遺民)을 거느리고 와 왕건에게 태씨(太氏)를 사성(賜姓)받았다.


<고구려>의 횡성 고씨(橫城高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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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의 59대 손인 중국 헤이룽장성 문물고고연구소 연구원 고지겸(70)씨 등은 횡성군 공근면 백리 고한석(64)씨등 횡성고씨들을 방문하고 횡성고씨 중시조 묘소를 참배했다.

<1995년 3월 5일자 강원일보>
국내에서는 당시 `만주에 거주하는 장수왕 후손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요양고씨 즉 고구려 고씨가 만주지역에 혈통을 유지, 살고 있음이 국내에 알려졌다.

▼ 한편으로 횡성고씨가 고구려 고씨라는 사실도 일반에 알려졌다.
1824년에 발견된 횡성고씨 족보에는 시조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임을 밝혔고,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둘째 아들 인승(仁勝)이 동국고씨(東國高氏)의 시조이고,
중시조 인승으로부터 12세 손인 민후(旻厚)가 횡성에 정착, 횡성고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4만여명의 횡성고씨 후손들은 지금도 횡성 원주 제천 영월 정선 등지와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백제>의 부여 서씨(扶餘徐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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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여륭(餘隆)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태자이며 원래 백제왕의 성씨인 부여(扶餘)씨였으나 나당 연합군에 패하고 당나라에 갔을 때 당나라 고종이 서씨를 하사하고 능진도총에 임명했다고도 한다. 그후에 다시돌아왔으나 후대는 알 수가 없다. 원손 서존(徐存)은 1세 조상인 서신일의 6대 후손으로 고려에서 병부상서를 지내고 태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원래 성씨인 부여를 본관으로 하였다.


본관은 이천()·달성()·장성()·연산()·남평()·부여()·당성()·평당()·복흥()·의령()·남양()·황산()·염주()·군위()·가성()·봉성()·용궁() 등 20본 가까이 현존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에는 153본, 《조선씨족통보()》에는 176본이 기록되어 있다.

서씨의 대종은 이천서씨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천서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씨족통보》에는 이천서씨에서 달성·장성·연산·남평·평당·부여 등이 갈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부여서씨의 시조는 서수손()으로 되어 있으나 《만성대동보()》에는 부여서씨의 시조가 백제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 융()으로서 나라가 망한 뒤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당고종()으로부터 서씨 성을 받았으며, 그 후손인 존()이 중시조로, 그리고 수손은 그의 11대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달성서씨의 시조는 서진()으로 고려 달성군봉익대부 부도판서 등 벼슬을 역임하면서 서씨 성을 받게된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6만 6571가구에 인구 37만 7833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14위였으며,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4만 4320가구, 인구 61만 1148명으로 성별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14위였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69만 3954명, 가구수 21만 5412가구, 286성 중 제14위로 전체인구의 1.5%를 차지한다.


<신라>의 부안 김씨(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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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김씨()는 경순왕장자 일(鎰:마의태자)을 시조로, 고려시대의 이부상서 경수()를 1세로 하고, 평장사 구()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만 7391가구에 5만 63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안김씨(扶安金氏)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맏아들 김일(金鎰)을 시조로 하여
고려 시대에서부터 부안에 뿌리를  내렸다. 문헌에 의하면  태자 김일(金鎰)
은 신라의 천년사직이 기울어지자  망국의 한을 간직하고 어머니 죽방왕후와 부인 김씨를 데리고 개골산(금강산의 별칭)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초근목피로 일생을 마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마의태자(麻衣太子)라고 불렀다 한다.

그의 후손 경수(景修)가 고려 때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문과에 급제하고 이부 상서를 지낸 후 부령(부안의 옛지명)에서 정착하고, 그의 아들 춘(春)이 부령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경수(景修)를 1세조로 삼고 관향을 부안으로 하게 되었다.  

부안김씨를 빛낸 인물로는 1222년(고종) 열두살의 어린나이로 성균관  진사에 오른 구(坵)
들수 있다.  그는 고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원부사록과  제주판관을 거쳐 원종때 예부시랑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북정록]을 집필하고 40여년간 벼슬을 역임하며 정치·외교·학문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구(坵)의 아들  4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는데, 그중 장남 여우(汝盂)는  충렬왕이 세자 때 원나라에 4년 간 볼모로 가 있을때 이를 호종한 공으로  형부상서에 올랐고,  차남 종우(宗盂)는 수창궁 녹사를 거쳐 전교시 부령을  지냈으며, 셋째 숙우(叔盂)는 서도판관,  막내 승인(承印)은 강릉 존무사와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여우(汝盂)의 두 아들 각(恪)과 식(軾)도 평장사와 이부 상서를  각각 역임하여 명문의 대를 이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계(棨)가 유명했다.  1552 식년문과에 급제한 그는 선조때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한어에도 능통했고 뒤에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문무를 겸비하여  이황,·김인후,·기대승,·이이 등과 함께 도의(道義)를 강론했다.

 

2002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안 김씨(扶安金氏)는 남한에 총 11,263 가구,
47,6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의 개성 왕씨(開城王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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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王建, 877~943)은 송악(개성) 사람으로 901년 궁예가 신라에 반기를 들고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이되었을 때 궁예를 도와 913년 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당시 기장이었던 신숭겸, 배현경 , 유금필, 홍유 등이 왕건에게 왕창근, 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궁예를 추출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를 개국한 후 삼국을 통일하고 473년동안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개국하면서 멸족를 당하게 되자 옥(玉), 금(琴), 마(馬), 전(田), 전(全), 김(金)씨 등의 다른 성으로 행세하며 숨어 살면서 혈통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정조 때에 비로소 문헌 등을 조사하여 왕씨로 다시 성을 바꾸어 세보를 만들고 왕건이 수도로 정한 송도(개성)을 본관으로 하고 왕원(王垣)을 1세 조상으로 하였다.


 본관은 개성() ·강릉() ·해주() 이외에 10여 본이 문헌에 전한다. 고려시대의 왕족으로 34왕 475년간 번영을 누린 씨족이다. 왕씨의 대종은 개성왕씨이며, 그 시조는 고려 태조 왕건()이다. 왕건의 집안이 본디 송악(:)지방의 호족이었다는 사실 이외는 그 선대에 대한 내력은 전해지지 않는다. 강릉왕씨의 시조는 태조의 아들 유()이고, 해주왕씨의 시조 유()는 본성이 박씨()였는데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움으로써 태조가 왕씨 성을 사성한 것이다. 따라서 해주왕씨와 개성왕씨는 동성이족()이다. 당시에는 태조에게서 왕씨 성을 사성받은 사람이 많았다. 각 지방의 호족들을 무마 포섭하기 위하여 그들과 혼연()을 맺거나 왕성을 사성()하였다. 예컨대 강릉왕씨에는 유()를 시조로 하는 일파 외에 차()를 시조로 하는 또다른 일파가 있었는데 차는 강릉김씨의 시조 김주원()의 6대손인 선희()의 아들로서 태조가 그의 딸을 왕비로 삼고 그에게 왕성을 사성하였다. 차의 일파는 그의 13대손 탄지()대에 다시 강릉김씨로 복성하였다.

이 밖에도 강릉지방의 호족 순식()이 왕성을 사성받았고, 발해의 태자 대광현()도 계()라는 성명을 하사받고 종적()에도 편입되었다. 그러나 1392년 이성계()의 조선건국으로 고려는 종지부를 찍었는데, 이 때부터 왕씨의 수난이 시작되어 조선 태조는 고려 왕실의 후예인 왕씨들을 멸족시키는 한편 고려의 사성으로 왕씨가 된 사람은 모두 본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또 왕실의 후예가 아닌 왕씨들은 모두 어머니의 성을 따르도록 했는데, 왕씨들이 전씨() ·옥씨()씨 등으로 변성했다고 전해진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1만 4118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79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4,815가구, 전국 가구 구성비 0.05 %로 순위는 274성 중 제82위였다.


<발해>의 협계 태씨(陜磎太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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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대중상은 천문,지리와 병법에 능통하였으며 696년(신라 효소왕 5년)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쪽에 진국(후에 발해)을 건국하였다. 그후 10세손인 태광현이 발해가 망한뒤 934년(고려 태조 14년) 고려로 망명하자 태조가 그를 예우하고 태씨 성을 하사 하였다. 그후 10세손 태집성이 고려 고종 때 대장군으로 서북병마사가 되어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협계군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을 협계로 하였다


본관은 협계()를 대종()으로 하고 그 밖에 영순() ·밀양() ·남원() ·통천() 등이 전해진다. 협계태씨는 주()나라 태전()의 후예라고도 하고, 기록상에는 발해국왕 대조영()의 후예라고도 한다. 발해의 왕성()이라면 대씨()이므로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당하던 무렵 고려에 귀화하여 태씨로 변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발해의 태자 대광현()이 수만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투화(), 태조로부터 왕계()로 이름을 하사받은 일이 있을 뿐이다. 역사상 대표적 인물은 조선시대 두남()으로, 그는 중종 때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다. 또 구련()은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이순신의 장검 두 자루를 만든 사람이다. 1930년도 국세조사 때에는 총 1,043가구가 있었는데 그 과반수인 568가구가 함경도에 거주하고 있었고, 특히 478가구가 집중되어 있던 점으로 미루어 북방에서 이주해 온 씨족의 후예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통천태씨 중국투화인()’이라 나와 있는 점으로도 발해 유민의 후예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4,333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111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795가구로 274성 중 제112위였다.


협계태씨족보(陜溪太氏族譜)는  바로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  발해(渤海)의  역사를  연구  해명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는  대표적인  족보의  하나 이다. 협계태씨족보(陜溪太氏族譜)의  체계는  일반  다른  족보와  달리,  그  구성이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  특징 이다. 일반  족보는  앞  부분에  조상들의  내력을  간단히  밝힌  서문 (머리글) 이  짤막하게  붙어  있지만,  협계태씨족보(陜溪太氏族譜)에는  서문(序文)만도,  구보서(舊譜序:(南北舊譜序, 南道舊譜序, 北道舊譜序),  정묘(丁卯)신보서(新譜序)  등이  있고,  그밖에  편자식(編者識)  및  발(跋:丁卯識,  丁卯跋),  범례 (일러두기) 등  여러  개가  첨부되어  있다.

그리고,  기본  족보의  서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발해국기원,  발해국  왕세  약사,  발해  유민이  고려  시대에  세운  공훈,  판서공 이하  8 충신의  사적,  발해국  지리와  강역  및  지도,  대씨가  태씨로  변한  사실,  발해  연대표  등  발해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는  내용들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서도  발해국  왕세  약사에는  왕실  계통도,  발해  종신록,  발해국  관제,  및  문물  제도,  발해국  외교  문서,  홍 연천의  발해세가,  발해  멸망  후,  대씨의  변동  및  지도에는  발해의  5 경  15 부  62 주,  발해  강역 고변,  지도  등.  소 제목들이  있으며,  대씨가  태씨로  변한  사실에도  명천군의  건치  연혁이  덧붙어  있다. 협계  태씨의  족보는  이조  시대에  들어와서  여러 번의  증보  편찬  사업을  진행하였다. 서문을  통하여  보면,  A.D 1706 년  태 창도가  편찬한  다음,  A.D 1809 년  김 굉이  또다시  증보  편찬을  하였으며,  A.D 1856 년  이 행연이  재차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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