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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곳, 카이스트 M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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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씨 아주대 갤 펌 (2007/03/20)


나는 지금껏 쉼 없이 달려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갔다.

삼성.
1년 반 정도는 회사 적응 기간이었고,
나머지 반 년은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에 우울증에 걸렸다.
그리고 나머지 반 년은 무척이나 바쁘게 돌아가는 업무 속에서 갈 길을 탐색했다.

나는 이력으로 보면 정통 공대 출신 엔지니어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는 문과, 대학은 컴퓨터 공학과 미디어학, 대학원은 전산과-특히 컴퓨터 네트워크, 그리고 회사는 삼성 통신연구소에서 2년, 무선사업부에서 1년의 경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지금 다시 MBA 과정에 도전한다.

나는 어쩌면 길을 비뚤비뚤 S커브를 그리며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아직 앞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고2 올라가기 직전에 나는 소설을 사랑했고, 일본 만화책에 푹 빠졌고, 혼자 이것저것 상상하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과목 중에서는 수학과 경제학이 좋았다.
그저 수학이 좋았기 때문에 이과에 가려 했으나, 아버지가 말리셨다.
그때의 나는 내 미래에 대해 어떤 구상도 없었다.
나는 화가가 되고 싶기도 했고, 작가가 되고 싶기도 했으며, 작곡도 거뜬히 해내고, 미술도 잘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난 어느 한 분야에 뛰어난 천재가 아니었다.
작곡을 하기엔 내 음악적 자질에 대한 자신이 없었고, 미술은 꼭 내 위에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이 있었다.
1등이 아니면 싫었다.
이 좁은 마산여고 안에서도 1등을 하지 못하는데, 내가 세상에 나가서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까.
이런 생각 때문에 공부를 택했다.

고제리가 생각난다.
마산, 창원 지역은 고등학교가 1995년 당시 수요에 비해 너무 모자라서 중학교 한 반 50여명 중에서 10명 정도만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다.
요즘 사촌동생들을 보니 대부분 인문계로 가긴 하더라만...
난 중1때 반에서 매일 11등 12등 사이를 오갔다.
그땐 아무 생각도 없다가 중 2에 올라가서 갑자기 전교 7등이 됐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경원 중학교는 교무실 건너편 벽에 전교 20등까지 이름과 사진을 붙여둔다.
순위대로 좌르르륵.
1~10등 까지는 윗 줄, 11~20등 까지는 아랫줄.
14살 어린 마음에 내 이름이 우와, 2학년 중에 윗줄에 있네!
조금 더 앞에 내 이름이 걸렸으면 좋겠다!!
자꾸 공부가 좋아졌다.

난 눈 앞의 목표가 명시적이어야 힘을 내고, 경쟁이 있어야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회사에서 의욕이 없었나 보다. 거기선 눈에 뜨이는 보상과 차별, 만족감 따윈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학원에 갔다.
과학고 반에 들어가서 흔히들 하던 성문 기본 영어랑 수학 정석을 배우기 시작했다.
주변의 아이들 모두가 경쟁자였고, 나는 경쟁이 너무 즐거웠다.
수학시간에 나는 매일 기도했다.
저한테 문제 좀 풀라고 시켜 주세요.
칠판에 나가서 풀고 정답을 맞추고 잘했다고 칭찬을 받고 싶어요.
하지만 참 안걸리더라 -_-;;

회사에 와서 자꾸 우울해하면서 나는 회사 상담소를 한 주에 한번씩 찾았다.
그때서야 내가 왜 칭찬에 목말라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엄마에게 칭찬을 받지 못했다.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내게도 항상성이나 관성 같은게 있어서, 엄마는 항상 남동생과 나를 차별하고, 나 따위는 공부만 잘하지 나머지는 다 개차반인 인간으로 대우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엄마에게 받지 못하던 사랑과 관심을 공부를 잘해서 받는 칭찬으로 치환해서 살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난,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인정받을 수 없는 인간으로 스스로 만들어갔다.
주변에서 아무도 나더러 '어머- 너 이번에 일등했니? 정말 부럽다~'란 소리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만족했던 것이다.
'아, 다행이다. 이번에도 일등이다. 행복하다. 엄마가 칭찬해 주실까'
그리고 성적표를 집에 갖고가면 엄마는 반응이 일회적이었다.
'아, 그래. 잘했네 우리딸.'
난 그 순간이 정말 행복했지만, 내 기대치에는 조금 모자랐다.
아.. 왜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는 걸까.
남동생을 안아 주듯이 나를 꼭 안아줬으면,
나도 사랑받고 싶었다.
엄마가 안아줬으면 좋겠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

모자랐다.
너무 모자라서, 나는 사랑이 결핍되고, 애정에 목마른 인간으로 자라났다.
언젠가 '좋은 생각'을 읽다가, 나같이 성장한 -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 어느 시인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때 바로 느낌이 오더라.
아, 이 사람도 나랑 똑같구나.
어릴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라면, 흔히들 나같은 인간이 된다고 한다.

나는 내 존재가치를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받기 때문에' 자존감을 가지는 게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비로소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살게 되었다.
한 반의 아이들에게 내 가치는 모르는 수학 문제를 물어보려고 할 때 존재하는 것이다.
저 아이가 내게 다가오는 이유는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물건을 빌리기 위해서이다.
저 아이가 내게 말을 거는 이유는 내가 저걸 풀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나는 외로웠고, 내가 뭔가 쓸모가 있지 않으면 세상에서 떨려나올 것 같은 두려움에 가슴을 졸이며 살았다.

필요가 아니라, 나를 정말 사랑해서 옆에 있어준 사람은 별반 있지 않다.
정현이, 가림이, 지원이, 선아, 회사에서 만난 여성 동지들.

아아- 난 평생 이 컴플렉스를 안고 살아가야만 할까.
나는 이 유용성에 관련된 컴플렉스 때문에 누군가 나에게 무엇을 빌리려 하거나, 나에게 자꾸 말을 붙이려 하면 도망간다.
저 사람은 단지 말이 하고 싶어서 나한테 다가온거야,
저 사람은 단지 내게서 자기가 필요한 걸 빌려쓰고 싶을 뿐이야.
저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걸 충족하면 다시 나를 떠나가고 못본척 할거야.
평소에는 나에게 말 한번 붙이지 않던 사람이 무슨 염치로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거지?

자꾸만 쌓이는 피해 의식.

똑같은 상황에서 내 의식기제가 이쪽으로 움직이는 걸 안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그 유용성마저 잃는다면, 그 사람이 나를 영영 버릴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찌됐든, 학창 시절을 지금까지 기록해 두자.
나중에는 그 아픔까지 기억못할지도 모르니.

중 2때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같은 반이었던 현정이가 뭘 하나 봤었다.
종로수학?? 뭐 이런 수학문제지였는데, 덩달아 나도 해야지..하면서 혼자 풀고..
그리고 중 3때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 고교 입시였다.
그 당시에는 걱정은 안 했다.
다만 만점을 받으면 학교에서 더 칭찬해 주겠지- 란 생각은 했지만 그다지 욕심은 안생겼다.
그때 성적우수자들은 교무실에 따로 야자용 자리를 만들어줬다.
그러면서 나는 경쟁욕을 불태웠다.
훗- 내가 인정받고 있구나.
그리고 집에 돌아가면서 아 저 달이 저 모양이면 상현인가 하현인가 중얼거리면서 살았고.

그러고는 조금 아쉽게도 세 개를 틀렸다.
지금도 기억난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하나 틀렸고, 수학도 하나 틀리고, 한문도 하나 틀리고.
뭐, 수학은 착각했었고, 사회쪽은 내 자만으로 실수한거고, 한문은 싫어했으니 상관없다.
그때 난 체육이 젬병이었다.
윗몸 일으키기 3개가 최고 기록이고, 지금도 그렇다.
매달리기는 1초였는데, 체력장은 입시에 들어가니까 죽을 힘을 다해서 7초 매달렸었다.
그래도 다 조작해서 20점 만점을 만들어 주긴 했지만, 오래달리기에서 죽을 정도로 뛰었다.
최고점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창원여고가 가까워서 가고 싶었는데, 운이 없게도 -_-;;;
집은 창원시의 동쪽 끝인데, 학교는 마신시의 서쪽 끝인 마산여고에 들어갔다.
뺑뺑이란-.

아침마다 봉고를 타고, 아마 여섯시 반쯤 출발했던 것 같다.
직장인 출근 시간대보다 빨리, 매일 어스름한 하늘 아래 봉고를 타려고 8차선 도로를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가끔 놓쳐서 직행버스를 타도 한시간이면 학교에 도착했다.
그래도 지각은 면할 정도로 이른 시간이었던 거다.

난 일학년때 혼자였다.
내 성격상 그런거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그때는 외롭다고 느끼지도 않았고, 혼자가 편했다.
이 곳 저곳에서 온 아이들.
그때 난 사람이 필요치 않았다.

한 이주가 넘도록 2분단 네번째 자리쯤에 혼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좀 무심하신 분이었던 듯.
그 반에 경원중학교에서 온 아이가 7명인데 모여 앉다 보니 난 혼자였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우울하다. 나 왕따였던가.
하지만 스스로 그것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니 괜찮았던 것 같다.
몇 주 지나서야 자리 배정을 새로 해 줬던 듯.
그때 만났던 짝과도 거의 말 안하고 나는 책만 파면서 살았다.
애들은 도시락을 까먹고 살았는데,
난 그 당시 도시락을 세 개 싸들고 다녀서 (책은 학교에 다 몰빵하고 가방안은 도시락 뿐)
학교 도착하자 말자 아침을 먹고, 남들이 3교시 쉬는 시간에 밥을 까먹을 때는 내 식사 시간이 아니었고,
점심 시간에 밥을 먹고..
그렇게 살았다.

음... 요즘으로 치면 진짜 왕따가 아닌가. -_-;;;
하지만 내가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까먹는 그룹에 끼이기도 싫다.

그때 내 이상형은 지원이었다.
처음 인상은 얘가 연합고사 두 갤 틀렸다던가, 세 갤 틀렸다던가 해서 동지의식을 느낀거였고,
나중에 도서위원을 하며 활발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나도 쟤처럼 수다도 떨고 인기도 많은 사람이 됐음 좋겠다..
라고 처음으로 롤 모델을 만나게 된거다.

1학년때 처음 시험을 치고 난 2등을 했다.
연합에 가면 비슷비슷한 애들이 많아서 중학교때보다 성적이 와락 하락한다고 하던데,
난 2등이면 뭐, 현상 유지는 했네- 하면서 조금 놀았다.
하지만, 지원이가 나중에 얘기해줬다.
일등이었던 고제리랑 너랑 처음 성적은 그렇게 차이 안났어.
근데 제리는 독하게 계속 공부하고, 넌 그렇지 않았던 게 나중에 차이를 만든 거라고.

조금 뜨끔한다.
사실은 지금도.
내가 경제학과를 갔었다면, 내가 광고홍보를 했었다면, 내가 아주대를 선택하지 않았었다면...
지금도 고민한다.
확실히 진로 결정은 고딩때 많은 조언과 얘기를 듣고 해야지..
나처럼 부모에게 반항하고 머리컸다고 내 갈길 가겠어요! 하면서 문과주제에 공대를 선택해서 내가 사서 한 고생을 생각하면 억울해 죽겠다. ㅠ.ㅠ
내가 선택한거라 힘들다 소리도 못하고 흑흑흑.
아주대는 장학금을 다 줘서 돈걱정 안하고 다닐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그리고 은근 내가 간 곳은 수능%가 높았다.
그런데 말이다.
29세가 된 지금 와서야 안다.
학교 이름이 중요하다는 걸.

여기 MBA를 와서 처음 사람들이 모였을 때 완전 분위기 웃겼다.
저 고대구요, 학교는 서울고구요, 양재고구요, 개포고? 구요, 무슨 중학교구요..
아 미쳐미여.
거기 있던 다른 언니가 그랬다.
'집이 강북이면 말도 못꺼내겠다야-'
언니- 집이 지방인 나도 그래요 -_-;;;

바로 고대 동문회 결성되고, 난 술잔을 들고 다른 자리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시작했다.
원래 한 자리에서 짱박히는 걸 좋아했는데, 너무 불편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그냥 20살때 다른 대학을 가거나, 21살때 재수를 할 것을.

아주대 1학년때 대부분의 입학성적 상위자들이 학교를 떠났다.
한의대, 교대... 재수 결정.
나는 재수는 생각도 못했고, 그냥 다시 미술을 하고 싶어서 재수하려다가 미디어학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알지.
그 애들은 지금 1년 돌아가는 게 나중에 몇 년을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라는 걸 알았던 거라고.

수학 시간에 삼각함수가 적분이 된다는 걸 알고 정서적 충격을 받은 거며,
내가 항상 잘한다고 뻐겼던 문과 수학 위로 이과쪽 수학이라는 천상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내가 더 이상 수학을 잘 하고,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정서적 충격과, 수학물리화학생물을 따라가야 한다는 중압감에 미쳤었다.
그래서 4년 내내 공부했다.
그래서 남은 건 학점이고 우수졸업생이라는 성적표에 기재된 딸랑 한 줄.
지금 내게 남은 건 뭔가?

이제는 안다.
정통 엔지니어가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교수님이 진정한 엔지니어 소리를 들으려면 대학원을 가야 한대서 또 아무 생각없이 대학원을 갔다.
서울대 포공 카이스트.
카이스트에 붙어버려서 대전으로 내려가긴 했는데, 거기서도 조금 더 진로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점점 네트워크에 관련된 연구를 해도 그게 세상에 효용이 없는거다.
내가 알고리즘을 효율적으로 고쳐서 IEEE communications 같은데 실려서 학계적 명성을 얻었다고 치자.
누가 쓰나?
차라리 시스코같은 회사에 가서 white paper를 내는 게 더 세상에 이바지하는 길이다.
이 동네에서 오래 살려면 연구를 해서 박사를 따고 교수를 해야지, 박사를 따고 삼성에 가면 후우-
우리랩에 있던 전자과 박사 분처럼 필드 테스트를 뛰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니까.
난 세상에 이바지를 하고 싶었고, 그 마음에 삼성에 뛰어들었다.
삼성은 실제로 소비자에게 바로 영향을 주는 제품을 만드니까 내가 만든 걸로 사람들이 좀 더 편리하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세상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지 않을까?
내 아이디어를 상품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_-;;; 왠걸.
현실은 달랐다.

입사후 연수 한달동안은 그럭저럭 재밋었다.
난 처음엔 여자들과 낯을 가리고, 그 여자들끼리 노는 분위기에 적응을 못해서 아웃사이더로 돌아다녔지만.
보기에는 재밋어 보이더라만. 후우-

그리고 통신연구소에 배치되서 면담을 하는데,
여기서 삼성의 인사 조직 문제가 드러난다!!!
나를 담당한 인사과 직원 -_-;;; 이년! 너 문과지!!!
지금도 화가 난다.
연구소 표준팀을 지원했는데 내 논문에 WLAN이 들어간다고 WLAN lab.에 보내는 거다.
후우-
그 랩은 무선랜을 연구하는 랩이 아니었다. -_-;;;
후우-
그래서 3년내내 인생 종친걸 생각하면 정말!
지금도 기억난다. 홍 XX!!!

배치후 일년은 리눅스 PDA가지고 이런저런 어플리케이션을 만드네? 하면서 구경하고
간단하게 드라이버도 짜다가
외주업체에 배달도 다니고
인도 사람이랑 일도 해보고..
그러긴 했는데..재미가 없었다.
월급이 아깝지가 않았다.
이런 일을 하는데 무슨 공돈? 하는 느낌이었달까.

그 때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고 다녔던 것 같다.

이년차가 되어서도 방황은 마찬가지다.
일은 재미가 없고, 내 퍼포먼스를 칭찬으로 돌려받는 것도 아니고.
피드백도 없고.
내 경쟁 의욕을 스스로 고취시키려 해봤자 금새 흥미가 떨어지고.
마치 유령처럼 내 몸은 사무실에 있건만 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
부장님이 물으시면 대놓고 대답도 나온다.
'김미화씨 이 새 기술에 대해 좀 알아보지?'
'네, 재밋을 것 같아요. 보고서 올리겠습니다.'
자아- 그리고 한 달이 지나서 그 얘기가 또 나온다.
'김미화씨 그 기술 좀 잘 알아놔, 나중에 필요할거야'
'저- 이제 재미없는데요'
이젠 저런 대답도 휙 나와버리는 거다.

재미가 뚜욱 뚝 떨어져갔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알아봤다.
삼성 경력으로 밖에 어디서 할 수 있을까.
취업은 어디에 할 수 있을까.
KT? SKT? ETRI?
안돼안돼. 에트리는 대전 구석이고 다시 돌아가기 싫어.
케티는? 와이브로 하면서 같이 일해 봤지만 -_-;;; 사양사업이라는게 눈에 보여. 죽어가는 공룡이지. 하지만 살이 많아서 몇십년은 건재할거야.
SKT는? 영어가 딸려서 뽑아줄라나?

이년차부터 계속 인도 엔지니어들이랑 일을 해서 덕분에 토익 점수가 올랐다.
따로 공부를 안해도 토익은 오른다.
시험 전날에는 꼭 해커스에 들어가 예상문제를 푼다.

입사 초반에는 노렸던게 개발 경력을 2년 쌓고 바로 카이스트 MBA 회사에서 보내주는 걸 쓰는 거였다.
하지만 입사해서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된다.
엔지니어는 MBA에 보내주지 않는다는 걸.
-_-;;;;
그래서 전배를 노렸다.
마케팅이나 기획에 가고 싶었다.
엔지니어는 위에서 내려온 오더대로 만든다.
내 상상력과 창의력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런데...
입사 초기에는 입사후 2년이상이라는 조건이 내가 3년차가 되니 3년 이상으로 바뀐다.
-_;;;;
4년차가 되야 전배 지원을 해볼 수 있단 얘기다.
그래서 자비로 MBA에 가는 걸 고려했다.
지금 내 나이 28세.
MBA에 가면 29세.
졸업하면 30세 막바지. 31세가 딱 되는 나이.
-_-;;;
이 결심을 일년 전에 할 것을.

회사 다니면서 자꾸 필드 테스트를 보내는데,
그 와중에도 토익보고, 에세이 준비하고,
보건휴가 내 가며 서류 내고..
정말 피터지게 열심히 준비했다.
에세이를 이렇게 쓰면 어떤 회사에도 붙겠다 싶을 정도로.

회사에 다니면서 점점 자신을 잃고, 자신감을 잃는다.
자꾸 삼성이라는 거대 기계의 일개 톱니같은 부품이 되어버려서.
과연 내가 밖에서 통할까. 내가 어떤 직업을 나가서 찾을 수 있을까.
자꾸 자신에 대해 의구심만 들고 괴로워지게 된다.

-> 한번 얘기를 시작하니까 끝도 없는 것이, 나 아무래도 이런 쪽으로 자기개발 도서를 써도 될것 같아.

난 이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내 경쟁력이 무언지, 내 장단점이 무언지도 모르는 혼란 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에세이를 쓰려면 자기에 대해 알아야 했다.
-_-;;;;
정말 제출 마감은 다가오는데 마음은 바짝바짝 타고, 나에 대해서는 쓸수가 없고.
결국 하루 휴가를 내고 에세이를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고...
그리고 겨우 막바지에 이르러 낼 수 있었다.

그때 나를 파악하고 그 면면을 포장하는데 정말 힘겨웠었다.
지금도 경력개발센터에서 이력서를 쓰라고 하면 장단점 칸이 정말 채워넣기 힘들다.
여전히 '나'는 오리무중인 것이다.

지금 내 경력은 참으로 요상하다.
아주대 컴공/미디어-카이스트 전산-삼성개발3년-MBA

어디에서 나와 같은 경력을 좋아할 지 오래오래 고민해봐야겠다.

그 고대파에게 상처받은 게 그거였다.
여기 동문회 날짜가 설대 연대 고대가 똑같은데 이 술집 골목이 그 학교 학생들로 꽉 차요. 한 80% 될껄요?
그럼, 나머지는? 나머지 20%는.
화가 났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무신경함에 화가 났고, 내가 스카이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그리고 아직은 한국에서 스카이가 대접받는 주류- 심지어 학생 사회에서조차-라는거에 화가 났다.
난 아주대를 나온게 사랑스럽지는 않다.
왜냐하면, 내 인생이 꼬인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대를 나온게 자랑스럽다.
난 그곳에서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고, 비록 돌아가는 길을 거기서 시작하긴 했지만, 정말 스스로를 갈고 닦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의 눈은 다르다.
내가 수능 1%였다고 하더라도 대접은 아주대 출신으로 받는다.
난 그 때 어떤 대학에 들어가도 복수 전공을 공대쪽으로 하면 상관없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공대를 가려면 재수 아니면 교차지원이 되는 곳으로 가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교차지원이 되는 아주대를 선택했고, 그곳에서 피를 토하며 공부한 거다.

내가 입학하고 졸업한 이후로 아주대는 점점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난 고대도 갈 수 있었고 중앙대 광고도 갈 수 있었다.
그걸 생각하니 더 배가 아픈 거다.
졸업한 학교가 잘 나가면 더 행복했을 텐데.
세상에서 더 대접받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이곳에서는 학부 어디셨어요? 물으면
'저 고대요' - 바로 답변이 나온다. 어머 나도 고댄데, 몇 학번이세요? ... 동창회 결성.
'저 연대요' - 바로 답변이 나온다. 어머 누구 알아요? ... 동창회 결성.
그러나 '
'저 아주대요' - 바로 답변이 나온다. 아- 그래요.
그리고 대화가 전환된다.

학교의 힘이라는 게 저거였다.
주류에 끼일 수 없다.
그들이 수능을 얼마나 잘쳤던 못쳤든 간에, 일단 학교의 울타리에 감싸이면 다시 재포장 되는 것이다.
xx학교 출신으로.

세상은 우리 생각처럼 휙휙 바뀌지 않는다.
내가 19살에 생각했던 건 대학의 서열이 중요치 않고, 내가 하고 싶은걸 할 수 있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아직 한국은 대학의 서열이 중요하다고.

이러니 내가 외국에 나가고 싶지.

차라리 아주대 석사를 갔으면 더 고민을 덜 했을지도 모른다.
이건 카이스트 석사를 가 놓으니, 내가 무슨 박쥐같은 거다.
-_-;;;
이 자기 정체성의 괴리를 어쩌면 좋담.

심지어 이곳에선 이화여대도 엄청난 동문 파워를 자랑한다.
조금 외롭다 -_-;;;

여기서 나를 조금 더 찾아보고 조금 더 쉬기도 하고, 교환학생도 나가볼거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정말 한 해도 쉬지 않고 달렸는데, 솔직히 지금도 달리고 있다.
여기 로드가 꽤 쎄서 회사에서보다 잠을 더 못잔다.
어제도 새벽 두시까지 공부했다.
숙제며 읽어야 할 영어 문서가 산처럼 쌓여있는데,
벽에 A4 종이를 하나 붙여두고 다음주에 해내야하는 숙제를 적으니 8개다. -_-;;;
심지어 지난 일요일엔 아침 9시에 일어나서 새벽 4시까지 움직이지도 않고 숙제한 적도 있다.

그래도 마음이 편하고 스트레스는 없나 보다.
몸이 붓지가 않는다.
점점 뱃살도 없어지고 있고. (오히려 운동량은 비슷한것 같은데...)
어제 그룹 숙제 때문에 조모임을 했는데 2시간 예상했던 토론이 8시간까지 늘어나서
오후 2시 반부터 밤 10시까지 토론하고, 발표 자료를 만들어서 새벽 1시에 재공지했다.
이야- 정말 치열하게 사는 것 같다.

경영학이란 공대 공부처럼 외우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길러 준다.
나는 상상을 바로 해버린다.
아- 이 회사가 이러니까 앞으로 이래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원래 은행쪽이나 이런 심사를 하던 분들과 같은 조인데, 그분들은 접근 방법이 달랐다.
이 리포트에 이런 구절이 있잖아요? 이 부분이 이 기업의 buyer와의 파워가 약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근거 자료가 된다고 생각해요.
오오오- 이렇게 근거를 들어서 말해야 하는구나.
끄덕끄덕.
많은 걸 배우고 있다. ^^

하지만 잠 좀 자고 싶다. 흙.
어제 2시 반쯤 자서..
오늘 마음껏 잤다. 12시쯤 일어났는데, 이제 남은 숙제 하나 해치워놓고,
선배들이랑 마음껏 이야기해봐야지.
프랑스에 가서 일하신다는 다른 선배 얘기도 듣고.
난 크리스찬 디오르나 루이비통 같은 그룹에서 아시아 지사장이 되는 게 목표다.
재밋어 보여 ㅎㅎㅎ

내가 아직 간이 회복이 안된걸 느끼는데,
난 공부하다가 피곤이 엄습한다.
룸메이트는 주로 새벽 4시까지 버티는데, 난 새벽 2시면 에너지가 딸리면서
안자면 죽겠다- 싶은게...
그래서 바로 뻗어버린다.
닥치면 또 읽게 되니까.
여기서는 영어 읽기 실력이 굉장히 중요한게,
이십 페이지짜리 영어 문서를 얼마나 빨리 읽고 요점을 캐치해 내느냐가 포인트다.
내가 이게 통신쪽 논문이면 삼십분이면 읽겠는데, 경영쪽 문서는 단어의 쓰임도 다르고 단어도 모르는게 많아서 아직 속도가 붙지 않는다.
힘내자!

BY 난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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