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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

[펌] 컨스터블vs 터너 - 영국 낭만주의의 두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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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guarneri/30021116507 에서 스크랩했습니다

프랑스의 낭만주의를 제리코와 들라크루아가 책임졌다면 영국에는 존 컨스터블과 윌리엄터너가 있다.

이들은 제리코와 들라크루아보다 20년 먼저 태어났다.

컨스터블과 터너는 겨우 한 살 차이였지만, 그들의 생각과 삶은 바하와 헨델처럼 너무 달랐다.

당시 컨스터블의 화풍은 관학적 화풍을 반대하는 이단아로 일찌감히 찍혔다가 죽을 때쯤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터너는대화가들의 작풍을 모범으로 삼아 늘상 그 경지에 오르고자 노력했으므로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점차 자신만의 눈으로 보는 세상을 그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에게 그의 그림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변했다. 결국 그가 말년에 이룩한 추상화 같은 풍경은 외면받았고, 터너는 거의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컨스터블과 터너의 실험은 당대화가들 및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려는 컨스터블의 눈과 색채를 통해 순간의 효과를 묘사하고자 한 그들의 새로운 시선은 인상주의라는 유파가 탄생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게 된다.


존 컨스터블 (John Constable, 1776-1837)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풍차가 돌아가는 모습으로 기상 변화를 읽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아들이 '저급한'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컨스터블은 관습적인 풍경화를 그리기보다는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당시 풍경화는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에 의해 앞쪽의 풍경에는 갈색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친구가 항의하자 그는 풀밭에 바이올린을 올려놓고 '너 색맹이냐'고 했다.

그는 '초록색의 화가'로 불린다.

컨스터블은 50이 넘은 1824년에 왕립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컨스터블은 39살이 될 때까지 한 점의 작품도 팔지 못했다.

컨스터블은 평생 해외 여행도 하지않고 자신의 고향인 서프포크 주의 자연을 유심히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다.

컨스터블은 인상주의 이전에 야외 작업을 한 최초의 작가로 기록될만큼

하루종일 캔버스를 세우고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그려냈다.

컨스터블의 주제는 눈에 보이는 '자연'이었다.

컨스터블의 가장 대표작인 '건초마차'는 1821년 한창 때 그려진 것으로 1824년 파리에서 공개되었을 때 큰 물의를 일으켰다..

컨스터블은 '자연효과의 순수한 지각을 구현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믿었으며풍경의 구체적인 세부보다도 하늘이나 빛, 대기의 상태 등에 더욱 관심을 가져, 순간적으로 변화해가는 효과를 기록하려고 노력하였다.

윌리엄 터너(JWM Turner, 1775-1851)

런던의 가난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발소 손님들의 초상화를 멋지게 그려내는 아들을

자랑스러워 했고, 자랑하기를 즐겼다.

터너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은 로랭이었으며, 그는 그를 닮으려 애썼다.

그는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라는 그림을 항상 클로드 로랭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해 줄 것을 요구했다.

터너는 1802년, 27살에 왕립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

터너의 시골 그림들은 대중에게 인기가 좋았다. 23살에 이미 그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주문이 쏟아졌다.

터너는 평생 30번의 해외여행을 다녔다.

터너는 달리는 기차에서 10분동안 목을 빼고 있거나, 불타는 국회의사당을 그리기위해 노를 저어가며 템즈를 건너는 것도 마다하지않았다.

터너의 주제는 색채였다.

터너의 대표작인 '<비, 증기 그리고 속도감-위대한 서부행 철도>는 1841년에 그린 그림이다.

터너는 회화적인 것과 숭고한 것, 즉 산이나 바다 또는 역사적 사건과 결부된 광경을 택하여 환상적인 일몰이나 신비한 빛, 자연의 난폭한 폭발, 묘사적 효과를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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