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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은 오키나와로 갔다 - 해상왕국을 건설한 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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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은 오키나와로 갔다

유구,琉球(오키나와) 해상왕국을 건설한 실존인물


홍길동은 소설의 주인공이었으며 역사상 실존인물이기도 하다.

역사에서는 반역자, 또는 도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소설에서는 봉건제도에 맞서 만민평등의 이념으로 활빈당을 이끌고 이상국(오키나와의 율도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고증에 의하면 홍길동은 조선초 15세기 중엽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신분이 첩의 자식이라 관리등용을 제한하는 국법 때문에 출세의 길이 막혔다. 좌절과 울분 속에 양반으로부터 차별받던 민중을 규합 활빈당을 결성한 후,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

홍길동은 1460~1500년대 조선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었지만 그의 마지막 행적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유구(琉球: 일본 오키나와의 옛 이름)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노력했던 한 일본인 연구가에 의해 새로운 단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홍길동의 오키나와로의 탈출 가능성에 대한 사학적인 연구를 한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그것도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닌, 일본 오키나와 현립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가데나 쇼도쿠(嘉手納宗德)씨였다.

그는 유구사를 새롭게 고찰하면서 홍길동의 유구행 가능성을 최초로 인정했다. 그렇다면 홍길동의 집단은 남해의 유배지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삼천리 바다건너 일본 유구열도에 이상향 율도국은 있었다.

국내에서 웅지를 다 펼치지 못한 홍길동은 무리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이국땅 유구열도에서도 만민평등을 부르짖으며 새 세상을 건설했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 ‘도적이며 반역자

오키나와에서는 - ‘이상국을 건설한 전설적 영웅

홍길동의 출생은 1443년, 성씨는 남양홍씨

홍길동의 출생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이복 형 홍일동은 1419(세종1년)에 태어났다. 또한 일본 오키나와 이시가키지마(석원도) 야에야마 박물관에 소장된 장전대주(홍길동의 처남)의 족보에는 홍길동이 정통(正統) 8년 즉 1443년(세종 25년)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 야에야마 박물관에 소장된 장전대주 가문의 족보 이 족보에는 김씨, 나씨,

윤씨 성을 가진 조선인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오키나와에 진출한 홍길동 일행이 대규모 집단이었음을 반영하고있다.

홍길동은 고려왕조 외척이며 명문세도가였던 남양 홍(洪)씨 집안의 서자로 태어났다.

밀직부사였던 홍길동의 할아버지 홍징은 이성계와 더불어 서해안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무찔렀으며, 동북명의 오랑캐(여진족)가 소란을 피우자 정몽주와 함께 사태를 진압하는 등 많은 공적을 세운 사람이었다. 공민왕과는 동서지간이며 문하시중을 지낸 파주염씨 중시조인 염제신의 맏사위이기도 했다.


남양 홍씨 남양군파 족보,

서자인 길동을 삭제 하고, 홍상직의 아들로 일동과 귀동 만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 우왕 14년(1388년) 최영과 이성계가 홍징의 처남 염흥방을 모반사건의 주모자로 내몰아 1000 여명의 신하들이 죽임을 다하는「무진참화」가 일어났다. 이때에 염흥방의 매부인 홍징은 친척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어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고려말의 충신이자 명문세도가였던 파주염씨와 남양홍씨는 위기를 피해 전남 장성, 나주, 전북 고창 등지에 내려와 정착하게 되었다.


명문가의 족보들을 모아 성씨별로 주요 인물만을 기록한것으로,

1920년경 편찬되었다. 만성대동보에 홍길동은 형 일동과 함께

홍상직의 아들로 올라 있으며. "도술을 부렸던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홍길동의 고향, 아치곡

홍길동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1리 아치실(아치곡)에서는 몇 백년은 됨직한 아름드리 감나무와 시누대(山竹)에 둘러 쌓인 생가 터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또 30여m 아래 계곡(암탉골)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는 '길동샘'이 있다.


홍길동 생가터

홍길동 생가터는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344번지 홍성두씨 집 부근에 있다.
울창한 대나무 숲에 둘러쌓여 접근이 어렵고 신비스럽기까지 한데 생가로 알려진

이곳의 집들은 모두 시누대 울타리를 했었는데 그것은 시누대가 집을 방어하는데

매우 좋기도 하지만,유사시에는 화살로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길동 샘

생가터 30m 아래 암탉골에 있는 홍길동의 먹고 자란 길동샘

1970년대 새마을 운동사업으로 주변이 훼손되기 전까지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다.

황윤석이 쓴 증보해동이적에는, “옛적에 듣자니, 국조 중엽 이전에 홍길동(洪吉童)이란 자가 있었는데 재상 홍일동의 서자 동생이다. (홍일동은 장성(長城)의 아차곡에 살았다.) 재기를 믿고 스스로 호탕해 하였으나 과거를 보아 청훈과 현직을 맡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국법에 구속되어 하루아침에 홀연히 도망갔었다”라고 기술됨.


증보해동이적

홍길동의 어머니는 관기(官妓)출신 옥영향(玉英香)으로 홍상직이 총애하는 여인이었다. 배가 다른 홍길동의 두 형(귀동,일동)의 어머니는 남평 문씨이다. 소설에서 길동의 어머니는 춘섬(春蟾)인데, 이는 홍길동전의 작가인 허균이 자신의 애첩 이름이 추섬(秋蟾)인데서 착안하여 명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홍길동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으며 부인의 이름은 ‘고을노’로 후일 조선에서 미질이 좋은 신품종의 볍씨(쌀)를 오키나와로 가져갔다. 오키나와 일대에는 이미 안남미(安南米)라는 남방계의 쌀이 있었으나 질이 좋지 않았다.

현재 오키나와 야에야마(八重山)지역에서는 ‘고을노’를 풍요의 여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이는 홍길동 집단이 해외로 떠나면서 오곡의 종자를 항아리에 담아 함께 가져갔음을 의미한다.

청년기 활동 - 1460년(세조 6년) ~ 1470년(성종 1년)

홍길동은 서얼의 관리등용을 금지하는 경국대전의 반포로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집을 떠나 나주목 관할 장성현 갈재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광주 무등산, 영암 월출산에 본거지를 정하고 주로 탐관오리와 토호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일반 백성에게 나눠주는 의적 활빈 활동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발행한 호적대장, 직계가족은 물론 외가 처가까지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서얼출신들의 관직등용을 근복적으로 감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활빈당은 지리산 근처의 경상도 하동군 화계현 보리암자에 지휘부를 두고 관군과 대항하였으며, 멀리 경상도 진주에까지 세력을 펼쳤다. , 김천 황악산에 들어가학조대사에게서 병법과 무술을 배웠다.

장영기(張永己) 라는 이름으로 변성하였으며, 전국 팔도(八道) 시장에 정보원(첩자) 파견하여 민심을 파악하였다. 그러던 1469(예종 1) 10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활동 무대를 서남해안의 섬으로 옮기게 된다.


학조대사는 홍길동에게 병법과 무술을 가르쳤다

1469년 11월 중순, 관군에 쫓기던 홍길동집단(활빈당)은 전라도 영광 다경포(현재의 법성포) 근처의 영평곶에서 배를 타고 나주 압해도(현재 신안군 압해면) 쪽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로써 활동범위가 육지에서 바다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훗날 뱃길로 3천리나 떨어진 일본 오키나와에 율도국이라는 해상왕국을 건설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집단공동체 생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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