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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풍파/인간사 새옹지마

[희망] 5개월을 벼르고 벼르다 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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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문함대 카페 멈출 수 없는 발걸음 님 글 펌

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투표를 해 본적이 없는 정치 무관심 제 살길 찾느라 먹고 살기 바쁜 그런 인간 중 하나였던 사람입니다

사실 3주 전에 이 글을 장장 새벽 2시부터 5시까지 쓰다 카페에서 쓰기 버튼을 누르니 글 모두가 다 날라가 버려 인생 슬럼프가 바로 엄습하야 축쳐진 3주를 보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대선 전에 이 글을 안 올리면 평생 마음의 병이 될 거 같아 작심하고 다시 써봅니다

저는 문국현 후보님을 5년 전부터 책과 몇 몇 TV프로그램 등을 통해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8월 23일 저는 피시방에서 30분 간을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범벅이 되어 모니터 앞에 울고 있었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아가씨와 스타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 대학생이 이상하게 흘깃 쳐다봐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요

뭐랄까.. 전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기도 했고 지난 날의 상처가 보듬어지고 있어 눈물을 흘리는가보다 했습니다

그 날 문함대 카페를 처음 가입하여 카페에 올라와 있는 글들과 동영상들을 하나씩 보고 있었거든요

특히 문 후보님 동영상을 보며 북받치는 눈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인생 자체가 비정규직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를 마흔 다되어 낳으신 어머님과 동생 세 가족이 살면서 똥꾸녕이 찢어지는 가난을 맛보았던 사람입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두 남매를 기르느라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제 눈에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을 하고 전 담임 선생님을 찾고 방송고등학교를 진학하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의아해 하시는 선생님에게 학업을 하면서 돈을 벌어 어머니 살림에 보태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어요

졸업을 하고 난 후 저는 일산 분당 평촌에 한창 신도시를 짓고 있던 공사장에서 철근 공그리(공사현장 용어) 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하루 온 종일 일하면 2만 7천원 일당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어요

중학교 졸업한 고1짜리가 무슨 아파트 공사 현장 잡부를 할 수 있냐는 질문을 하실 수 있겠지만 그 당시 저의 체격이 왠만한 어른보다 큰 체격이었고 얼굴 또한 나이에 비해 매우 노티나는 얼굴이었기에 가능했었습니다

그 당시 신도시 공사 현장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부실 시공이 줄을 잇고 있었는데 제가 일했던 평촌 신도시 현장의 아파트가 시공 중에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었습니다

일을 하면서 타워크레인을 타는 일도 해보았고 몇 번의 추락사를 할 뻔 했던 경험, 수백 볼트 전기에 감전됐던 일, 같이 일하는 인부가 현장 엘리베이터(호이스트라고 함)에 팔이 끼어 팔이 부러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건설회사들이 모자라는 시멘트를 충당하기 위해 중국산 시멘트를 투입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고 직접 그 시멘트를 나르며 사모레 개는 일도 직접 하였습니다
중국산 시멘트는 국산 시멘트가 40키로그램 짜리였던 것 과는 달리 50키로그램이어서 10키로 차이라 하더라도 나르는데 매우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중국산 시멘트는 굳지 않기로 유명한 시멘트로서 악명이 매우 높았던 제품이었습니다

그 당시 일을 하는 인부들끼리 일당으로 우리가 짓는 아파트를 준다 해도 갖고 싶지 않다는 말을 많이 주고받았었습니다

당시 저는 건설회사의 하도급 체제를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문후보님께서 하도급 체제의 문제점을 많이 지적하셨었지요?

공사 현장 일을 관두고 설비가게에서 보일러 시공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는 일은 지하실의 벽을 오함마와 정으로 하루 종일 깨기 시멘트 포대 나르기 사모래 개기 폐기물 나르기 등을 했습니다

특히 이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오후에 한창 사모레를 개고 있는데 멀리 골목에서 중학교를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학교를 파하고 올 때 마주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창피했던 저는 머리 위에 수건을 두르고 그 위에 야구 모자를 덧씌워서 얼굴 양 옆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체 삽질을 하곤 하였습니다

늘 오후 3시가 지나기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나네요

친구들이 알아볼까봐 늘 죄짓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마음이 무겁고 부끄러웠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에게 일당을 가져다 드릴 수 있는게 행복이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어머니께서 그 당시 불법 다단계 업체에서 일을 시작하시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벌어다 드리는 돈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형국이 되고 말았어요

이후 어머니와 함께 했던 불법 다단계 사업 일, 가스경보기 방문 판매 일, 아이들 과외 선생일, 다시 건설용역회사 일 등을 다니면서 제 고등학교 시절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고3이 끝나갈 무렵 저는 서울 방화 지구에 하도급 일을 아저씨 한 분과 맡게 됩니다

제가 맡은 하도급 일은 800만원짜리 일이었는데 아저씨 한 분과 4개월 만에 일을 끝내면 400만원이 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하도급일은 건설회사가 원청 회사에게 일을 주고 그 원청 회사가 그 밑에 도급회사에 일을 주고 그 도급 회사가 그 밑에 하도급 업자에게 일을 주는 것이었는데 제가 맡은 일은 마지막 하도급 업자가 준 일이었지요

하지만 추석 연휴 때 공사 자재 2500만원어치를 현장에서 도둑맞으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을 했고 돈을 결과적으로 받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서 이듬 해 봄 어머니가 암 말기 판정을 받으시게 됩니다

중환자실에서 10개월을 투병하셨는데 그 당시 저는 밤에는 어머니 간병을 하고 새벽에는 건설 용역회사에 나가는 일을 매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19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장례식 다음 날부터 어머니의 빚쟁이들이 빚독촉을 위해 저희 집에 찾아오기 시작을 하더군요

집 보증금을 밀린 월세로 인해 다 까먹으면서 부의금 남은 돈으로 누으면 하늘이 보이는 삭월세 방을 얻어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남겨 주신 빚 2500만원... 나중 알게 된 것이지만 재산을 물려받은게 없으면 부채도 물려받지 않는 것인데 역시 무지는 가난의 편이더군요

일가 친척이 없던 저로서는 저의 삶의 문제를 상의할 수 있는 어른이 주위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저는 그냥 알 수 없는 이유로 미친듯이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근 일년에 삼백권이 넘는 책을 읽어댔던 거 같아요 평생학습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2년 동안 1500만원의 부채를 갚아나가다가 아는 선배의 소개로 자동차 영업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친형처럼 저를 잘 보살펴 주던 그 형은 제 신용카드 두 장을 빌려가서는 1500만원어치 해외 카드깡을 받아 저는 단숨에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용불량자가 되고 난 후 정상적인 취업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됐고 이듬 해 그 무시무시한 IMF가 터져버리더군요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유배달 신문배달 생활정보지 배달 과 같은 일들이었습니다

10대에 뒤이어 저의 20대가 비정규직 일로 채워지는 순간이었지요

20대 초에 신용불량자가 되면서 저는 기로에 서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살고 망가지면서 한탕을 노리는 삶을 살을 것인가
아니면 책을 열심히 읽고 내 가치를 계속 높이는 작업을 통해 내 개인부채와 신용불량 문제 등을 해결할 것인가

이미 몇 년째 수백권씩 해마다 책을 읽고 있던 저의 선택은 후자였습니다

친구들은 대학교 진학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녀석들은 월급 모아 재테크를 시작한다 뭐다 신발끈을 고쳐매는 동안 제가 깨달은 것은 성공의 출발선이 서로 다르구나 누구나 한 곳 똑같은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냉정한 현실을 깨닫는 것 뿐이었습니다

사창가에서 신문을 돌리던 첫날이 기억나네요

오토바이가 없어 구르마에 신문을 싣고 난 다음 비오는 날 새벽 구역 인수인계 담당자와 저는 모자를 눌러쓰고 빨간 등이 양쪽 줄지어 있는 사창가에 신문 배달을 시작했습니다

야한 노출 심한 옷을 입은 아가씨들 사이로 고개를 숙이고 신문을 배달하며 정말 죽고 싶은 기분도 느껴보았습니다

겨울 칼바람 맞으며 오토바이 타며 우유를 배달하던 일 눈이 4센티미터씩 쌓인 길을 몇 번씩 넘어지며 우유배달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꽁꽁 얼은 손을 후후 불며 신문을 돌리는 삶을 사는 동안에도 책을 읽고 계속 학습해 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제 20대가 비정규직으로 점철된 10년 넘게 족히 4000권 가까운 책을 읽었던거 같아요

부채를 갚는 법 관련 도서만 60권 넘게 읽은 거 같습니다


이후 저는 신용불량자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고 지금은 더 이상 비정규직 근로자가 아닙니다
고졸자이지만 대졸자 직원들을 두고 있는 작은 회사의 사장입니다

그러다 유한킴벌리 사례를 5년 전에 접하게 되었어요
'아 이런 평생학습을 회사 차원에서 추진하는 CEO도 있구나'
유한킴벌리라는 회사와 CEO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가
연초에 대선후보로서 문후보님 이름이 언론에 가끔씩 등장을 하는 걸 보고 약간 옆 머리털이 곤두서곤 했었습니다

이윽고 8월 23일 대선출마를 선언하시 던 날 저는 문함대 카페를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카페 회원이 3000명이 조금 넘었었던거 같아요

정성스럽게 모여져있는 글들을 보다 EBS지식채널의 문후보님 동영상 시리즈를 보기 시작하면서 저는 서두에 언급한대로 한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제 젊은 청춘이 비정규직 인생으로 가득찬 장면들이 오버랩되기 시작했고 문후보님의 철학과 걸어온 인생이 저의 아픈 상처와 기억들을 치유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내가 유한킴벌리 공장의 수위로라도 취직할 수 있었다면 내 삶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공장에서 파지를 줍는 일이라도 이런 경영자 밑에서 한 솥밥을 먹었다면 내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 없이 자란 저로서는 후보님의 모습을 통해 부성애를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제가 그렇게도 미친듯이 책을 읽어대면서 도대체 이렇게 책을 읽어대는게 도대체 내 인생에서 무슨 도움이 될까 고민했던 저의 과거가 보상받는 그런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사례가 결코 다른 이에게 롤 모델이 될 수 없는 제한적인 사례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 기업의 운명을 단숨에 지속적으로 바꾸어 나간 문후보님의 사례를 자료들을 통해 목격하면서 저는 상처의 치유와 지난 과거의 보상을 느껴보았습니다

평생의 삶을 가치관과 철학을 실천하는 장으로 보여준 한 최고경영자의 모습에서 인자한 아버지,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지도자이자 억눌리고 신음하는 민초들의 고통스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던 거 같아요

자료들을 탐독하면서 사회 경제 정치 교육 전반에 아우르는 통합된 솔루션을 갖춘 리더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오피니언 리더들에 해당하는 분들과 자주 교류를 나누고는 합니다

그 분들 모두가 문후보님을 수년 전부터 알고 계신 분들이며 문 후보님에 대해 자주 얘기를 나누어 봅니다

아는 분들은 압니다

문국현 솔루션에 대해서요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투표를 해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는 투표를 꼭 하려고 합니다

이미 주변에 97표를 모을 수 있었고요

길 지나가다 후보님 유세 트럭을 보면 빵과 우유를 사나르기 바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카페의 님들 또한 눈물을 흘리신다면 저와 다르지 않은 눈물이라고 보아집니다

문후보님은 부를 소유한 부자이되 가난한 이들의 눈물 젖은 빵의 의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고통으로 신음하는 민초들의 신음소리가 이 사람을 똥냄새가 진동하는 정치판으로 내몰았나 봅니다

어느 님이 올리신 그림을 볼 때마다 눈물이 울컥 솟아오르곤 합니다

저 또한 그 걸음 뒤로 멈출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딪고자 합니다

저의 미천한 글이 내일 자정까지 이 카페에 새로 가입할 새내기 회원님들에게 작은 울림이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펌 허용)

(고마리님의 조언대로 아고라 정치방에도 올려놨어요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391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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